여행후기 Review
헬로우트래블과 함께 했던 여러분들의 추억이 너무 궁금합니다!
멋진 사진과 함께 소중한 여행후기를 작성해 보세요.
작성일 | 작성자 | 조회수 |
---|---|---|
2007-03-02 | 이*화 | 1210 |
- 전체
- 사진을 정리하다가~
안녕하세요.
1월 25일쯤에 프랑스 시내와 루브르 관광을 했던 이상화입니다.
돌아온지 오래되니 날짜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
저희는 블루 호텔팩이였어요. 선생님이 유난히 많던팀 기억하세요?ㅋㅋ
아마도 지리선생님 기억하시지 않을까요? 저는 그 옆쪽에 있던 세계서 선생이랍니다.ㅋㅋ
저 개인적으로는 2번째 유럽 여행이였는데요, 돌아온지 두달만에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렸습니다. ㅋㅋ
프랑스에서 저희 가이드 하셨던 분 성함은 생각이 안나고, 건축 공부하시는 분이였어요~
정말 추운날, 박물관에서 시내투어까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명하신것 중에 맘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말씀 드립니다.
노틀담성당앞에서 백년전쟁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백년전쟁의 승리는 \"영국\"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백년전쟁의 승리국가는 \"프랑스\"에요.
전쟁 초반에는 영국에게 굉장히 유리했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잔다르크가 나오면서 자극받은 프랑스 군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는 영국이 모두 승리합니다. 학교에서는 전 이부분을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진걸 그 후로 모두 이겨먹었다 라고 설명하지요. ㅋㅋ
학생들도 노틀담에 많이 갈텐데, 잘못된 설명을 들으면 안될것 같아서요~
그곳에서 들은 설명이 오랫동안 이렇게 잊혀지지 않듯, 학교에 오는 학생들도 생생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와서 수업을 들을텐데 잘못된 설명은 시정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얘기했음 좋았을텐데 그날 너무 춥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말씀 드리지 못했었는데 사진을 보다보니 생각이 나서 몇자 올립니다.!!^^
저도 이제 여행의 기억을 접고 학교로 다시 돌아갑니다!
헬로우 유럽 덕분에 유럽역사의 현장에서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보고 역사적으로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감사했어요, 그리고 번창하세요.
1월 25일쯤에 프랑스 시내와 루브르 관광을 했던 이상화입니다.
돌아온지 오래되니 날짜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
저희는 블루 호텔팩이였어요. 선생님이 유난히 많던팀 기억하세요?ㅋㅋ
아마도 지리선생님 기억하시지 않을까요? 저는 그 옆쪽에 있던 세계서 선생이랍니다.ㅋㅋ
저 개인적으로는 2번째 유럽 여행이였는데요, 돌아온지 두달만에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렸습니다. ㅋㅋ
프랑스에서 저희 가이드 하셨던 분 성함은 생각이 안나고, 건축 공부하시는 분이였어요~
정말 추운날, 박물관에서 시내투어까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명하신것 중에 맘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말씀 드립니다.
노틀담성당앞에서 백년전쟁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백년전쟁의 승리는 \"영국\"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백년전쟁의 승리국가는 \"프랑스\"에요.
전쟁 초반에는 영국에게 굉장히 유리했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잔다르크가 나오면서 자극받은 프랑스 군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는 영국이 모두 승리합니다. 학교에서는 전 이부분을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진걸 그 후로 모두 이겨먹었다 라고 설명하지요. ㅋㅋ
학생들도 노틀담에 많이 갈텐데, 잘못된 설명을 들으면 안될것 같아서요~
그곳에서 들은 설명이 오랫동안 이렇게 잊혀지지 않듯, 학교에 오는 학생들도 생생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와서 수업을 들을텐데 잘못된 설명은 시정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얘기했음 좋았을텐데 그날 너무 춥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말씀 드리지 못했었는데 사진을 보다보니 생각이 나서 몇자 올립니다.!!^^
저도 이제 여행의 기억을 접고 학교로 다시 돌아갑니다!
헬로우 유럽 덕분에 유럽역사의 현장에서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보고 역사적으로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감사했어요, 그리고 번창하세요.
세계사 선생님 앞에서.. 감히 부족한 점이 많았으리라 생각 됩니다.
아래내용을 잘 보아주세요''
1337년에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난 백년전쟁.
1337년에 시작된 전쟁은 92년후인 1429년에서야 잔다르크에 의해 오를레앙의 탈환이 이루어 집니다. 전쟁중 4/3 기간동안 영국이 프랑스 영토를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프랑스북부 칼레 지방,<원래 칼레/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합니다.>, 은 전쟁 종식후에도 100년이 넘는 1558년까지 영국영토로 남아있게 됩니다.. 프랑스가 전쟁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필립 공작이 1435년 프랑스 쪽으로 돌아서면서 프랑스가 영토방어에 성공한 것입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를 독립 군주국가로 있게한 전쟁입니다 유럽사에서 커다란 변화지요. 그렇기때문에 전쟁 말기 영토유지에 성공한 프랑스측의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사관에 무게가 실리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잔다르크 설명하기 위하여 다소 극적인 예를 들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아래는 백년전쟁 간략한 내용입니다.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14~15세기 유럽에서 프랑스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포함한 여러 문제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
100년 내내 지속되지는 않고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수세대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들의 싸움이 되었다. 문서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1337년에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프랑스에 있던 잉글랜드의 봉토를 놓고 일어났던 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12세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에는 어떤 왕이 자신의 왕국 밖에서 작위를 상속하면 다른 왕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이후 결혼동맹과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왕에 대한 작위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1328년 죽었을 때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기옌(프랑스 남서부에 있던 아키텐의 일부) 공작이자 퐁티외(영국 해협에 있음) 백작이었다. 게다가 샤를 4세에게 아들이 없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에 맞서 상속권을 주장한 발루아 백작은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손자로서 손아래 가계 출신이었다(→ 중세, 발루아 왕조). 프랑스 의회는 발루아 백작(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왕위계승을 결정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프랑스 내에 다른 왕의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한 필리프 6세가 1337년 기옌 영지를 몰수하자 다시 왕위를 요구했고 플랑드르로 군대를 보냈다.
중세의 전투에는 쌍방이 격돌해서 승부를 가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행해진 방법은 요새를 겸한 주요도시를 오랫동안 포위공격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에 맞섰던 필리프 6세(1350 죽음)와 장 2세(1350~64 재위)는 계속 방어만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잉글랜드가 프랑스 지방을 점령하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칼레 시를 포위공격해 이듬해 점령했다.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에드워드 흑세자는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장 2세를 사로잡았으므로 프랑스는 협약을 맺어야만 하는 상황에 빠졌다. 칼레 조약(1360)으로 에드워드는 이전에 그가 필리프 6세의 봉신으로서 갖고 있던 영토에 대한 완전한 종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조약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장 2세가 감금 도중 죽었고, 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샤를 5세는 조약 준수를 거부해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잉글랜드 쪽이 프랑스에 맞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입장이 되었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점령지는 차차 줄어들어 갔지만 1380년 샤를 5세의 죽음으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380년 이후 두 나라는 각각 내부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불안정한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플랑드르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결국 폐위당하고(1399), 그의 사촌인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정신병 발작으로 통치를 못하게 된 샤를 6세 대신 실권을 차지하려고 샤를 5세의 형제들이 싸우고 있었다.
샤를 6세의 삼촌들 중 하나인 부르고뉴 공작이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1404년 죽은 뒤 그의 아들 장은 경쟁자인 삼촌 오를레앙 공작 루이 당주를 1407년 암살했다. 결국 프랑스는 아르마냐크파(오를레앙을 편들며 뒤에는 왕세자 샤를을 지지한 무리)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틈타 다시금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부르고뉴 공작 장이 보복으로 아르마냐크파에 암살당하자 헨리 5세는 장의 아들인 필리프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1422년까지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은 파리를 포함한 루아르 강 이북 지역의 프랑스 땅과 아키텐을 지배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쪽의 운세는 기울게 되었다.
헨리 5세는 어린 아들을 남기고 1422년 죽었으며, 통치능력이 없던 샤를 6세 역시 몇 주 뒤 죽었는데 그의 왕위는 아들 샤를 7세가 이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구원병이 잉글랜드군의 오를레앙 포위를 풀게 함으로써 전쟁은 중대한 전환점에 접어들었다. 그뒤 부르고뉴인들에게 붙잡힌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측에 팔려 이단죄로 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같이 넓은 나라에서 프랑스인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가 없는 한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필리프 공작은 1435년 프랑스 쪽으로 돌아섰다.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장미전쟁을 틈타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1453년까지는 아키텐 전역을 점령했다. 프랑스 땅에 잉글랜드가 최후까지 가지고 있던 거점인 칼레는 1558년에 프랑스로 넘어갔다.
역사가들은 백년전쟁을 서유럽 국민의식의 발전에서 한 이정표로 간주하고 있다. 수많은 승리와 좌절을 맛본 뒤 결국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에 간섭하려는 야망을 버렸고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국내 발전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게 싸워 마침내 왕위를 지킨 발루아 왕가로 인해 프랑스는 단지 이름뿐인 왕국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 내의 독립 군주국가로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