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Honeymoon

행후Review

헬로우트래블과 함께 했던 여러분들의 추억이 너무 궁금합니다!
멋진 사진과 함께 소중한 여행후기를 작성해 보세요.

작성일 작성자 조회수
2007-12-07 양*식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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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님, 파리에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박사님 !
뒤늦게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게 지난 8월 24일은 너무나도 인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저는
'중년의 행복여행'의 유럽베낭여행팀 일원으로 35일간의 투어 중 마지막 파리에서
지난 8월 23일 파리와 프랑스 등에 대한 박사님의 친절하시고 열정적인 가이드에 감명을 받았던 여행객입니다.
그동안 박사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려다 주소를 찾지를 못하고 미루다가
'파리'부분의 여행 낙서를 정리하다가 비로소 찾을 수 있어서 이제서야 감사를 드립니다.
고국에 돌아오시어 소식을 주시면 고맙겠습ㅂ니다.
뵙고 소주라도 한잔 같이 나누고 싶사오니 꼭 소식 바랍니다.

다음은 그때 파리에서 느낀 낙서들입니다.
아직도 사진이 정리가 안되어서 차후에 사진은 메일로 보내드릴까... 생각합니다.
이 메일 맨 아래의 \"즐거운 여행\"을 누르시면 제 블로그입니다.

부디 대망을 이루시어 금의환향 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양판식 올림

파리에 도착하여...
8월 23일 아침 8시 33분, 파리 Bercy역에 유로특급열차가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다.
프랫트홈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이동 도중에 일행의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가며
선녀가 박영옥님의 이탈로 역에 남아서 한참을 기다리는 사이에 길을 잃지않도록 신경을 써야했다.
우리 일행은 지하철 입구에서 다시 차표를 구하는 동안 꽤 긴 시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9시 5분, 지하철 입구에 당도하니 통로엔 입추여지가 없이 여행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빽빽히 들어차 있는
비좁은 역사가 파리의 첫 인상을 흐려 놓는다. 하긴 한국인들의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가는 곳 마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오전 09:12 Bercy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하여 09:20 Nation역에서 환승, 09:30 Porte de Montreuil역에서 하차했다.
출구를 나오니 비가 계속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다. 09:44 비를 맞으며 호텔에 도착하니 오전이라서 아직 방이 나오질 않았다.
호텔 프론트에서 대기하다가 2층 회의실에 짐들을 일단 보관해놓고 호텔 뒷편에 있는 까르프에서 점심 먹거리를 구입하고 투어를 시작~
곧장 다시 지하철을 이용하여 베르사이유궁전으로 이동,
대프랑스제국이 유럽을 제패했던 지나간 위용과 영광, 스케일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밤 10시 반까지 오르세미술관 관람과 세느강, 에펠탑의 야경 등을 감상하며 파리시내를 구경하고
지칠대로 지친 선녀를 채근하여 간신히 호텔에 돌아와 자정이 가까워서야 숙소에다 여장을 풀고서
파리에서의 첫 날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8/25 19:10 - 10.17 24:00정리

파리투어... 베르사이유궁 관람 등
오전 11시 5분, 다시 지하철역Porte de Montreuil역에서 베르사이유궁전으로 가려고 지하철에 탑승, 파리투어를 시작했다.
11 :33 Alma Msrceiu역에서 하차하여 세느강을 건너가며 멀리 보이는 에펠탑과 세느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1 :44 Pont de L'ALma 역에서 베르사이유행 전철로 환승, 12 :15 Chatesu de Versailles Versailles Rive Gauche 역에서 하차,
낮 12시 25분, 베르사이유궁전 앞 광장에 도착하여 입장권을 사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약 1시간 이상을 기다리다가 궁 입구에 있는 울타리 겸 다리 조각물 옆에서
준비해간 빵과 과일 등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단체 입장권을 구하는 것을 기다렸다.
오후 1시 40분, 드디어 베르사이유궁전에 입장을 하여 3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각자 관람을 시작했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베르사이유궁전은 광대무비한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파리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곳 중에 하나가 베르사이유궁전이란다.
베르사이유는 프랑스공화국의 건설에서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프랑스왕정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프랑스가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위대한 문화와 역사의 유산이 되어서 왕이 살았던 거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왕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프랑스 절대군주제의 확립을 상징하는 것이자
당시 유럽 전역에 걸쳐 하나의 모범으로 뻗어나가던 프랑스 정치와 문화의 저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17세기의 산물이자 프랑스 국왕들 중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루이14세 LouisXIV의 화신이다.
55년간 프랑스를 통치하면서 '태양왕'으로도 불렸던 루이14세(1638~1715)는 두 가지 목적에서 베르사이유궁전을 만들었는 데,
첫째는 왕국 내의 귀족세력들을 자신의 주변에 모아둠으로써 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통제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강화하고
둘째는 자신의 권능과 훌륭한 치세를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궁전은 대규모로 커져갔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궁정에 묶여있는 귀족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가 위해 음악과 연극 등 예술창작이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오후 2시 반, 궁궐관람을 마치고 정원이동하여 다시 줄을 서서 순환카 Petit Train 승차권 표를 사려고 기다려야 했다.
오후 3시 10분, Votre Circuit en Petit Train에 탑승하여 또 14분을 기다려 15:24에 The mini trains이 발차를 한다.
베르사이유정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하루 3천명에서 1만명의 사람들이 오갔던 베르샤이유는 루이14세의 '짐은 국가이다'는 그의 말이 나타내듯
프랑스의 중심은 베르사이유였고 베르사이유 중심은 루이14였다.
루이14세는 자신의 엠블렘인 '태양'을 통해서 왕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평화와 예술의 神 아폴로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또한, 태양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일출과 일몰이 보여주는 변함없는 세계의 질서를 암시한다.
왕의 기상과 취침은 베르사이유의 가장 중요한 일과로 정蠻?예식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서열에 따라 귀족과 대신, 시종들이 왕을 알현하였다.
식사와 기도, 국사, 사냥과 만찬 등 왕의 일과 또한 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었으며 궁정의 모든 사람들은 말과 행동을
각기 영역에서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만 하는 등 베르사이유의 주된 역사는 루이14와 함께 했다.
그렇지만, 베르사이유의 최초 주인은 루이 13세였으며 루이15세를 거쳐 루이16세가 마지막 왕을 장식하였다.
따라서 베르사이유는 부르봉 왕가의 영광과 쇠락을 동시에 겪는 역사의 장소가 되었다.

오후 5시, 베르사이유 정원 관람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전철역으로 이동을 했다.
오후 5시 20분, Chatesu de Versailles Versailles Rive Gauche 역에 도착하여 23분, 지하철에 탑승했다.
17:36 Alarme행 발차
17:57 전철 차창밖으로 미라보다리에 세느Seine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특히, 다리의 멋있는 장식과 조각품들이 예술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해주고...
파리를 가로 질러 노르망디 Normandie로 빠지는 775km의 세느강을 따라 프랑스의 에술이 꽃을 피우고 있는
마네, 드가, 세잔느, 고호, 고갱 등이 숨쉬고 있는 곳으로 진수를 찾아 들어가서 한번은 맛보려고
18:15 Invalides역 하차, 오르세미술관을 향해서 이동했으나 전쟁박물관에 도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8:37 버스에 승차, 오르세미술관으로 향했다.
18:55 오르세미술관 입구에서 우산을 들고 지그재기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
19:24 오르세미술관에 입장을 하여 관람을 하기 시작했다.
20:20 오르세미술관의 관람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였는데 일행에서 박영옥님이 보이질 않았다. 관람전에 혼자서 빠져 쇼핑을 하러간 듯
21:00 일행들은 오르세미술관을 벗어나 에펠탑을 향해서 세느강변을 따라 걸어서 이동하였다. 선녀는 너무 지처서 자꾸 뒤처진다.
22:00 에펠탑 아래에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빛나고 있는 에펠탑을 둘러본다.
22:35 Bir-Hakeim역에 도착하여 22:41 숙소로 돌아가는 전철에 탑승, 23:10 Nation역에 도착 23:20 환승을 하여
23:30 Porte de Montreuil역에서 하차하여 숙소호텔로 도착하자 곧장 오전에 호텔2층 회의실에 맏겨둔 짐을 찾아들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배정받은 807호실 방에서 여장을 풀고 1시가 지나서 잠들었다.
오르세미술관에서 혼자 빠져나간 박영옥님이 그때까지 돌아오질 않아서 염려를 하면서 잠을 청했다.
파리 지리를 잘 모를 텐데 혼자서 길을 잃고 헤메느라고 호텔을 못찾아 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꿈에 그리던 파리를 거닐며~~!
8월 24일, 01:00 807호실에서 취침. 06:37 기상했다.
07:30 조반, 08:30 호텔 프론트 집결하여 지하철로 이동, 09:05 Porto de montreuil역에서 루불행 탑승, 09:26 Galeries La Fayette 환승,
09:35 Palais Royal Musee du Louvre 하차, 09:40 루불박물관 카루제개선문(1차)으로 이동하여 잠시 기다렸다가 가이드를 만났다.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투어는 오전부터 가이드가 있어서 더욱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따라서 마지막 날의 여행일정은 이번 장기 유럽베낭여행의 의의를 더욱 강하게 심어주었고 가장 감격적이며 인상적인 날이 되었다.
루불박물관, 개선문, 일식당의 김치라면, 시테섬, 노틀담성당, 세느강변, 콩코드.드골광장, 달팽이요리 등 역시 가이드 필요를 확인했다.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 일행과 다른 연수생 등 30여명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파리1(Pantheon-Sorbonne)대학교 영화미학과 박사과정 이익주님!
[ etranger1210@yahoo.co.kr tel 06 67 76 40 70]의
인상적인 가이드를 통하여 해외관광에 있어서 한국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매너와 요망되는 자세 등 프랑스에 대한 안목을 더 한층 높이고 새로운 사실들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말과 책 등으로서만 숱하게 접한 영웅 나폴레옹과 함께 위대한 프랑스 문화와 위용을 새삼 느껴게 되었고
예술의 수도 파리의 멋과 아름다운 면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찬탄과 부러움을 아끼지 않을 수 없었고 더우기 탈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오전 10시 반, 가이드를 따라 루불박물관의 근처에서 사전설명 청취후 11시 43분부터
세계 최고라는 루불박물관Musee du Louvre 을 입장하여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등 관람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 10분이 지났다.

오후 2시 25분, 값싸고 맛있게 점심을 들 수 있다는 일본인 식당을 안내받아서 오랜만에 '김치라면'과 '새우튀김밥(덴돈)'을 함께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김치와 밥, 라면 등을 맛볼 수 있었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식대도 선녀와 내 몫을 합해 18.5유로에 불과, 비싸지 않았다.
오후 3시 경 점심식사를 마치고서 잠시 일행들과 헤어져 선녀와 둘이 10여분 동안 상가로 나아가면서 쇼핑을 하려가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는 다시 모이기로 한 루불박물관 옆 최초 개선문[1차]으로 향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 3시 15분 경- -
그런데, 뜻밖에도 구두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그동안 지고있던 선녀에 대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위스 베른 구두가게에서 선녀가 몹시 사주길 원했던 구두를 갑이 좀 비싼 것 같아서 선뜻 사주질 못하고 멈칫거리다가 말아버렸던 것이
내내 미안함으로 남아서 날 우울하게 했고 때로는 평형감각을 상실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질 못하여 충돌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내심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인 스위스에서 가장 선녀를 화나고 슬프게 했던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지워버릴 수 없었는데~,
문뜩 구두가게를 지나면서 싫다고 하는 선녀를 억지로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구두를 고르게 하였다.
빨간구두 1컬레를 100유로 밖에 안주고도 사 줄 수 있었다. 선녀에 대한 그간의 미안함을 씻어버렸고
선녀와 함께한 이번 여행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스위스에서 나의 속 좁은 판단으로 선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던 앙금들까지도 말끔히 털어내 버리고 아름답게 마무리~~
하였기에 선녀와 둘이서 새로운 출발과 함께 앞으로 같이 重年을 누려가면서 사랑과 부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는 날이 되었다.

오후 15시 40분, 카루제 개선문(1차) 에 다시 집결하여 오후 투어를 시작,
바로 인근에 있는 '뚜알레정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루불박물관 뒤로 이동하여 16:12 버스 탑승,
16:15 뽕네프Pont Neuf 다리에서 내려
프랑스 최초의 석조교량인 뽕네프 다리를 30년에 걸쳐 건조했다는 384명의 석공들 얼굴 -
그 중 1명은 여자석공 얼굴인 뽕네프 얼굴이다 - 등을 구경하며 다리를 건너 시테섬으로 갔다.
16:30 파리의 중심으로 파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구왕궁이 있었다는 시테Cite섬으로 이동,
평당 30억원 이상이 간다는 또한, 파리에서 가장 비싸다는 땅에 서서 기념촬영도 하며
지금은 프랑스 대법원 최고재판소, 콩시에르주리 - 원래 왕궁의 일부로 건물관리소였으나 프랑스대혁명 때 죄수들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마리 앙뜨와네뜨'가 사형장으로 가기전까지 갇힌곳으로
프랑스대혁명 당시 당통,로베스피엘 등 2,600여명이 사형장으로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
- 3년만에 건립한 성물을 보관하고 있는 성 샤펠성당 앞에서 잠시 멈춘 뒤, 일반법원, 파리경찰청, 지하주차장과 시립종합병원 -
루이14세가 당시 정치범들을 정신병원에 가두었던 곳- 등 옛 프랑스 왕정의 터전에서
또한, 월~토 아침이면 꽃시장이 열리고 일요일엔 새시장이 열린다는 화원과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16:50 이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노틀담대성당으로 이동하였다. 시테섬의 중앙인 노틀담대성당 앞 동판에 올라서서 기념사진도 찍은 뒤,
17:00 1163년~1345, 180여년에 걸쳐서 건립한 유럽 최초의 고딕양식의 대성당이자 성지인 노틀담Notre dame대성당 앞에서
프랑스 문학과 카돌릭문화에 대한 본거지를 확인하며 대성당의 뾰쪽한 첨탑과 장미창 등 아름다운 모습과 웅장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Notre(우리의) + dame(부인) = '우리들의 부인' 즉 \"성모마리아\"를 일컫는 노틀담성당 앞의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 -
17:20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노틀담대성당 안으로 입장하여 제단 뒤의 피에타 상과 루이 13,4세의 동상 등 내부를 관람했다.

프랑스 문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두 요소를 들자면 카돌릭과 로마의 유산이라고 한다.
비록 오늘날 공화국의 이념에 의해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고 1970년대 이래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프랑스 사회의 저변과 프랑스인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카돌릭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다.
법정공휴일 11개 중 7개가 카돌릭의 전례와 연관이 있으며 모두 국민 개개인의 종교와는 관계가 없이 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는 중세는 기독교의 시기가 되어 기독교 신앙이 중세인들의 의식과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자연스럽게 성당과 수도원의 건축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오늘날 프랑스에 남아 있는 중세의 유적은 대부분이 교회의 건물들이다.

중세의 건축은 12세기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딕양식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하게 되며
이 고딕양식의 대표적 성당이 너무나 잘 알려진 파리의 노틀담성당~!
파리의 시테섬Ile de la Cite에 위치한 노틀담Notre dame de Paris은 1163년에 착공하여 1345년, 82년만에 완공되었다.
노틀담은 노틀Notre(우리의)와 담dame(부인)이 결합된 말로 '우리들의 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중세에 접어들어 종교의 인간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이러한 신앙심의 발로로 성모 마리아에 봉헌하는 성당이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곳곳에 만들어지게 되는데
노틀담은 그 중의 하나로 파리의 성모성당을 의미한다.

노틀담의 건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규모 교회 건축물의 조성에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는 바,
이는 중세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 길에 나서게 되었다.
기나긴 구도의 여정은 수도원의 건축을 촉진시키는 한편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십자군원정 발발 원인이 되었고
또한, 사람들의 왕래는 도시와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드높은 첨탑은 신의 세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17:40 파리의 뿌리와 파리의 시작을 음미하면서 노틀담대성당을 떠나 파리시청사로 이동하며
인기스타 이효리가 거닐었다는 세느강변의 인도와 차도를 인상깊게 거닐며
17:50 파리시청사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군악대의 행렬을 바라보며 시청사를 배경으로 샤터를 눌렀다.

18:16 HOTEL de VILLE에서 콩코드Concorde광장으로 이동,
18:20 콩코드역에서 내려 역사의 무대가 된 콩코드광장Place de la Concorde에 서서 프랑스대혁명을 돌아봤다.
1772년에 완성된 콩코드광장은 애초 루이15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루이15세Louis XV'광장으로 명명되었지만
대혁명 직후인 1790년 '대혁명광장'으로 개명된 이 광장은 대혁명의 주요 집회장소가 되었고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기로틴Guillotine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형장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왕의 위엄을 과시하려던 선전장소에서 왕가가 처절한 종말을 맞이하는 최후의 장으로 전락하였다.
루이15세의 동상이 파괴되고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Marie Antoinette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오늘날 프랑스가 자랑하는 공화정이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구체제를 지탱했던 왕족과 귀족들만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고 혁명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지켜내기 위하여 시행되었던
공포정치la Terreur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통Danton 마라Marat 등 혁명의 주역들까지도 잔혹한 숙청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죽음의 광풍은 공포정치의 1인자였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1794년 7월 처형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혁명기간 중 모두 2,498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중 1119명이 이 혁명광장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공포정치가 사라지면서 1795년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하나로 모으자는 취지에서
광장의 이름을 '화합과 일치'를 의미하는 콩코드Concorde로 바꾸었다.
프랑스인들은 자기의 나라가 공화국이며 공화국의 이념을 지키기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한다.
프랑스의 국가와 국기도 이와 관련이 있다. 1789년 대혁명 때에 태어난 프랑스를 상징하는 삼색기는 바스티유감옥이 습격되기 전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파리의 상징인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만든 2색 휘장을 사용하였는데
얼마 후 국민군Garde nationale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라파이에트Lafayette장군이 여기에 프랑스왕실을 상징하는 흰색을 덧붙임으로써
오늘날의 삼색기 원형이 만들어졌으며 이렇게 해서 '통일과 화합'의 상징이 되어 국민의회로부터 승인되고 널리 사용되었다.

파리에서 가장 큰 콩코드광장을 둘러보며 광장의 '화합과 일치'라는 화두로
프랑스의 미국독립전쟁 지원과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에 대한 분노,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일어선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발원지에서 혁명에 따른 피의 제전,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처했던 콩코드광장과 프랑스 대혁명의 진전과정,
자유 평등 박애 등 혁명정신,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혁명을 종결하고 독재정치를 펼치다 1804년 황제에 오르고
혁명의 이름으로 유럽의 전쟁에 나서 1805년 체코의 도시 오스테르리츠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격파한 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이
루불박물관 옆의 최초 개선문과 샤를드골광장에 세운 2차 개선문이며
나폴레옹이 3수를 하여 육사에 입학한 황제에 오르기까지의 성공과 몰락에 대한 새로운 이해 등
프랑스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안목을 더 한층 높이게 해 준 해박한 가이드
이박사님의 설명과 열변에 모두들 뜨거운 힘찬 박수를 보냈다.

18:40 1900년 파리국제박람회에 구한말 대한제국에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참여하여 전세계에 조선을 알리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광장의 분수대를 배경으로 포즈도 취해보는 등 파리광장들을 둘러보면서 여행의 의미를 되뇌어 보았다.
18:50 콩코드광장에서 개선문으로 가는 George v역으로 이동, 19:04 George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샹제리를 지나며
19:15 개선문에 당도하면서 천국의 거리 '샹 제리제'[샹-거리, 제리제-천국]의 수은등과 거리에서 파리의 에술과 멋, 낭만과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다.
19:20 샹 제리제 거리와 오페라, 개선문 앞에서 나폴레옹과 샤를드골광장에서 드골을 바라본다.

코르시카섬 촌뜨기인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고 대프랑스제국의 위업과 영광을 있게한 개선문~!,
파리의 도심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개선문Arc de Triomphe는 높이 50m, 너비 45m, 앞뒤 길이 22m에 달하는 거대한 문으로
1805년 나폴레옹이 체코 오스테르리츠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한 것으로
파리를 프랑스를 넘어 명실상부한 유럽의 수도로 만들기 위하여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계획하고 그 일환으로
이딸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 있는 개선문을 본 따서 지금의 개선문을 만들도록 하여 프랑스 저력을 상징하였고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방사선 모양으로 펼처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빛을 발하는 별 모양을 닮아 개선문을 둘러싼 광장을 에투알광장Place de l'etoile이라고 불렀다[etoile은 '별'을 뜻하는 불어].
현재는 1970년 서거한 드골장군을 기리기 위해서 샤를드골광장으로 개칭하였으니
개선문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2명의 장군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정신을 상징하는 개선문과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을 과시하는 에펠탑의 위용에 얽힌 일화 등 설명을 듣고서,
19:48개선문에서 Etoile 역으로 이동하며 Charles de Gaulle- Concorde
20:00 Concorde 하차 8번으로 이동, 20:05 지하철에 탑승, Grands Boulevards역 하차
20:11 Grands Boulevards역에서 프랑스 달팽이요리 식당으로 이동, 20:20 식당에 도착하여 달팽이와 양고기 등의 달팽이요리를 먹었다.
21:20 식대로 선녀와 나 2인분인 요리 32유로, 팊 2유로 등 모두 34유로를 지불하고 식당을 나와서 올때 내렸던 지하철로 이동했다.
21:40 야간 세느강 유람선의 투어를 그만두고 가이드와 헤어져서 다 함께 Grands Boulevards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향해서
22:05 Porte de Montreuil역에 도착,
22:15 호텔 807호로 향하면서 그간 수고를 너무 많이 해준 김선미양에 대해 부족하지만 우리 둘의 정성을 표시했다.

여행 마지막 날, 개선문에서 파리여행 가이드의 마무리를 하면서 쏟았던 유학생의 말들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프랑스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고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유럽과 세계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한국인으로서의 위상을 해외에서 매일매일 체험하고 생활하면서 느끼고 있는 실상과 함께
우리들과 그리고 오늘을 사는 젊은 학생들에게 사자후를 토했던 호소는 모두에게 진한 인상을 남기며 심금을 울려주어서 파리관람의 대미를 장식하였고,
더우기 우리 일행들에게 프랑스 요리로 '최후의 만찬'의 자리를 마련, 맛기행까지 하도록 귀중한 체험을 갖게 해주었던
명가이드~,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인 유학생 이익주 씨...
고국에 도착하면 e-메일로라도 감사를 전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부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계에 널리 떨치고
세계속에 더욱 굳건히 우뚝 설 수 있는 훌륭한 영화감독으로 대성하기를 기원할 뿐 만 아니라 또한, 그의 열렬한 팬이 되리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감사를 드린다!

저녁 9시가 지나서 만찬 후에 세느강에서 '야간 유람선 투어'를 하는 것은 포기하고 모두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두번 다시 둘이서만 오붓이 이런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너무나도 값진 하루였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프랑스는 카돌릭과 로마와 골족의 문화유산에 정신적인 토대를 두고 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게하는 프랑스는 왕정과 공화정의 무수한 역사와 흔적들이 기념물들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우리 베낭족 일행들이 본 대부분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에는
그 밑바탕에 바로 이러한 카돌릭과 로마문화와 함께 그 역사의 깊이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시공간의 여행이자 타임머쉰이기도 한 여행이었다.


파리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며... 8월 25일,토요일~
아침에는 해가 빛나고 맑아서 파리의 날씨를 좋아했는데 공항으로 출발할 때엔 짙은안개와 흐린날씨로 변했다.
파리를 떠나는 날 새벽, 호텔 방의 냉방가동을 정지시킬 수가 없어서 싸늘한 추위를 느끼며 잠을 자다가 설치며 깼다.
여행의 마지막인 호텔방에서 가족들을 만날 기쁨으로 잠들었다가 추위에 깨어나 있노라니 선녀 역시 깨어 있었다.
긴 유럽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샤를드골공향에서 귀국비행기를 타야한다.
오전 10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공항에 도착하여 오후 1시 45분발 방콕행 타이항공 비행기를 타야된다고 생각하며
새벽 6시 6분, 잠에서 깨었으나 좀 더 느긋하게 누워서 게으름을 피며 기다린다.
아침 7시 기상을 하여 짐들을 챙기고 아침 8시 반, 아침식사를 하려고 1층 호텔식당으로 들어가기전 공중전화에서
윤지와 국제통화를 했더니 어느덧 현철이가 잘 걷는다고 한다.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로는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었지만
비행기에서 긴 시간을 보내려면 든든하게 배를 채워두어야 될 것 같아서 맛없는 빵으로 배를 채워두었다.
오전 9시 반 무렵, 호텔프론트로 나가 방 열쇠를 넘겨주고서 호텔 바로 앞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어서 선녀와 함께 구경을 나갔었다.
그냥 돌아오려다가 선녀가 옷가게에서 아침운동을 할 때에 입을 수 있는 옷과 모자 등 세탁만 하면 새옷이나 다름없는 제법 쓸만한
좋은 것들로 4가지를 골랐다. 값은 모두 합해서 불과 19유로 밖에 안된다고 하였다.

오전 10시, 호텔 앞에서 우리부부와 샹그레부부는 대기시킨 택시에 함께올라 샤를드골공항으로 향했다.
오늘날 프랑스로 향하는 대부분의 국제선 여객기는 파리 북서쪽에 있는 1974년에 개항된 샤를 드골 Charles de Gaulle국제공항을 통한다.
샤를 드골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대독저항전선을 이끈 프라요스의 국민적 영웅인 장군이자 전후 강력한 영도력으로
'위대한 프랑스'의 기틀을 다진 대통령으로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프랑스가 지향하고 있는 공화국의 이념을 대표하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혁명의 3가지 기치는 오늘을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핏줄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진국인 프랑스라고 하여도 택시기사는 승객에게 바가지를 씨운다고 하여 대장이 호텔프론트에
45유로에 공항까지 가기로 했다고 한다. 출발전에 바가지를 안쓰려고 미리 요금과 승차인원을 약속하고서 승차했다.
샤를드골공항 에어포트까지 미터기로 40.3유로였다. 약속한 45유로와 팁 1유로를 포함 46유로를 지불했다.
운전기사가 중국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어를 잘 모르는 지 내가 중국말로 대화를 청했으나 알아듣질 못한것 같았다.

10:30 30여분 만에 공항에 도착하여 각자 23유로씩 부담을 하여 팊 포함 46유로를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11:00 타이항공에 가방과 내가 메고다녔던 베낭 등 2개를 먼저 화물로 부친 뒤에 나머지는 휴대하여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12:00 코펜하겐과 밀라노에서 선물로 구입한 면세물품의 세금을 돌려받으려고 줄을 서서 오랜시간을 환급창구에서 기다리다가 헛수고만 했다.
환급청구서를 그냥 내밀기만 했으면 되었을 것을 창구 앞에서 기다리며 공연히 신용카드의 번호를 기재해버려서 바로 환급이 안된다고 한다.
귀국하여 신청서류를 우송하면 기재한 신용카드계좌로 돌려준다고 한다. 언어소통과 해외여행 경험 부족으로 인한 착오이다.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던 박영옥님은 모두 현금으로 되돌려 받았는데...

12:05 너무 오래 일행들과 떨어저 있어서 이미 출국장으로 나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출국장으로 나가려다가 선녀가
그래도 일행들이 공항 처음 집결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일단 가야한다고 말리는 바람에 되돌라 나와서 가보니
다행이 일행들이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희동(조점례)님이 싸온 주먹밥으로 급히 점심식사를 때우면서 대장에게 파리에서 쓴 공동경비를 지출하고
12:20 출국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공항면세점을 돌아보았으나 물건들이 너무 빈약했다.
형은과 형국에게 마땅히 선물할 만한 물건이 없어서 둘러보기만 하며 기다리다가 호주머니의 동전을 모두 털어서 준~에게 주려고 초코렛을 1개를 샀다.
13:30 타이항공 TG931편 방콕행 비행기에 탑승, 13:45분 발 예정인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렸다.
14:10 이륙을 시도, 드디어 14:25 파리의 샤르드골공항을 이륙한 타이항공은 파리에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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